2011. 1. 14. 16:10
그런 날이 있다. 술을 마시고 싶기는 한데, 안주 챙길 것이 귀찮고 그렇다고 안 마시자니 허전하고, 지갑도 가벼워서 누군가를 불러낸다는 게 더러는 귀찮고 더러는 미안하지만 그렇다고 안 마시자니 섭섭하고. 좀 드물기는 하지만 그런 날이 있고, 그런 날이면 편의점에서 맥주나 화려한 옷을 두른 알코올 소다수를 사 마시곤 한다. 어제는 저녁을 잔뜩 먹고 배가 불렀기 때문에 맥주는 손에 잡히지 않아 스미노프 레몬 소다수를 마셨다. 어쩐지 새빨간 라벨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코카콜라를 제외하고, ‘빨간 딱지’가 붙은 제품을 선호한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는 책등에 붙은 빨간 딱지, 미끈하게 빠진 라이카의 검은 몸에 붙은 빨간 라벨, 말보로 플레이버의 뽀얀 얼굴에 새겨진 빨간 네모…. 생각해 보면 더 많겠지만 여기까지.
스미노프의 첫 모금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기도 전에 후회했다. 아무리 배가 불러도 맥주를 마시거나 아무리 귀찮아도 소주를 마셨어야 했다고. 혀끝에선 어떤 알코올의 징후도 느껴지지 않았다. 새빨간 라벨에 낚였던 것이다. 모종의 배신감에 손에 잡히는 것도 눈에 들어오는 것도 없어, 애꿎은 술병을 가만 바라보다 문득, 혼자 마시는 술이 외롭게 느껴지는 건 알코올 함량이 턱없이 높거나 낮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젯밤엔 잠깐, 외롭다고 느꼈던 것 같다.



사실, 스미노프 소다수에겐 잘못이 없다. 소다수라고 씌어 있었으니까. 소다수를 잘못 이해하고 빨간색에 혹한 내 잘못이다. 얼마나 크고 아름답든 머지않아 거품처럼 스러질 것이 ‘기대’라는 것을, 잠시 잊고 있던 내 잘못이다.
Posted by izayo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