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10. 15. 16:40

 

깊은 밤, 날짜는 무의미하다. 불면과 소화불량으로 시간은 흐트러졌고, 그러는 동안 술에서 한 걸음쯤 떨어져 지냈고, 하루에 두 세 개의 일을 처리하는 날들이 이어졌고. 그러다 보면 날짜와 시간은 지워지고 낮과 밤만 남는다. 그 밤 중에 어떤 밤이었다.

거북이보다 느린 걸음으로 걸어가는 포토샵과 일러스트 사이를 오가며 끙끙거리고 있었고, 술자리 제의를 거절해야 했다. 술자리에는 못 가더라도 술은 마시고 싶었다. 사무실에 책상을 내어준 2인 중에 1인이 남은 맥주를 꺼내왔고, 사무실에 책상을 내어준 다른 1인이 동참하는 바람에 삼분의 일가량 남아있던 맥주는 금세 바닥을 보였다. 깊은 밤이었고 맥주를 사러가기는 무섭고 귀찮았고 사무실에 책상을 내어준 2인은 전혀 술을 사러 갈 의지가 없어 보였다(그만 마실 것도 아니면서!). 그러다 사무실에 책상을 내어준 다른 1인이 촬영 후 받아온 술이 4병 중에 소주의 알코올 도수와 가장 비슷한 이강주를 꺼내들게 되었고, 안주 없이 마실 수는 없어 중국집에 술국을 배달시켰고, 거의 처음으로 사무실에 책상을 내어준 2인과 나는 테이블에 둘러 앉아 이강주를 마시게 되었다. 향이 좋은 이강주를 칭찬하기도 하고, 촬영 스케쥴이 빡빡해 서로 만나지 못했던 동안 일어난 일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시시콜콜한 몇 가지 이야기를 하다 사무실에 책상을 내어준 2인은 게임에 빠져들었고, 나는 못다한 작업을 마무리지었다.

깊은 밤, 날짜는 무의미했어도 술자리는 의미있었다. 대화는 지속되어야 하지만 그것이 매일 지속될 필요는 없다. 서로가 서로를 염려하고 있다는 사실만 잘 전달되어도 -화려한 수식어로 치장하거나 가슴 아픈 반어법을 사용하지 않을 수록 사실은 더욱 잘 전달될 것이다- 대화로서의 기능은 충분하다. 그리고 그 기능을 유연하게 만들어주는 것으로 술이 사용될 수도 있다. 술은, 식객의 한 에피소드에 나오는 것처럼 영혼을 망가뜨리지 않는 선에서, 사용되어야 할 것이다. 다스릴 수 없다면 애초에 꺼내서는 안되는 것이다. 다스릴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꺼내드는 순간, 사람은 한없이 나약해진다. 그 모습은 전혀 가엽지 않다. 그러므로 나는 언젠가 다스릴 수 없는 순간이 오면 과감히 버릴 것이다. 술도, 나도.

 

 

Posted by izayo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