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5. 11. 17:41

처음으로 자가주유라는 것을 해 보았다. 어쩌다 보니 저녁을 거르게 되었고, 며칠째 기분은 분 단위로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고, 술이 간절했기 때문이었다. 그럴 때면 주소록을 뒤져 술친구를 섭외하곤 하는데 어제는 그것마저 귀찮았고, 그러다보니 집에서 대기 중이던 그에게마저 손을 내밀고 싶지 않았다. 한 편으로는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그에게 조금 미안하기도 했지만 그것마저도 모르는 척하고 싶을 만큼 몸도 마음도 지쳐 있었다. 무엇보다 자가주유는 ‘self’니까. ‘self’만큼 가벼운 것이 또 어디 있겠어. 그래서 자가주유를 위해 veloso로 갔다.

한산한 veloso는 늘 그렇듯이 아름다웠다. 맥주를 주문하고, 안주삼아 샌드위치를 곁들이고, 가방 속 카메라를 꺼내 몇 번의 셔터를 누르고, 노트를 꺼내 펼쳐 놓고, 컵에 따른 맥주를 한 모금 마시니 식도와 위 사이에 걸려 있던 무언가가 쏙 내려가는 기분이 들었다. 처음으로 시도해 본 자가주유는 그렇게 황홀하리만큼 아늑했다.

꽤 오랜만에 편안하다, 고 생각했다. 머릿속을 뒤져 말을 꺼낼 필요도 없었고, 이토록 좋은 음악 속에서 흥미롭지 않은데다 듣고 싶지 않은 말을 걸러낼 필요도 없었다. 말하지 않고 듣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 좋은 건 알고 있었지만 어제는 유독 좋았다. 사납게 불던 바람이 잦아들어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기분이었다. 괜찮아, 괜찮아질 거야…. 언제나 듣고 싶은 그 한 마디를 어제는 내게서 들었다. 나는, 가끔은, 나를 칭찬해 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를 바라보는 건, 나를 인정하는 건, 누구보다 내가 되어야 한다. 그동안의 나는 나를 비하하기 바빴고… 어쨌든 유치한 나르시즘에서 비롯된 자아도취라 생각하지 말아줬으면 좋겠다. 내가 날 사랑하겠다는데 막거나 비하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그러는 당신은 당신을 사랑하느냔 말이다. 아무튼 먹고 마시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가만 앉아 있다가 veloso를 나서는 길, 내가 마지막 남은 손님이었다는 사실에 짜릿하기까지 했다.

앞으로도 가끔은 이렇게, 아무도 모르게, 자가주유를 하는 것이 좋겠다. 나를 위해서라도, 내 안에 고인 오물이 다른 사람들에게 튀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그러다 보면 혼자서 선술집에 앉아 소주를 기울이게 될 날도 오겠지. 아, 그렇게 되면 나는 진짜로 술을 즐길 수 있게 될 거야.

Posted by izayo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