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5. 24. 19:53
생각해보니 자가주유가 처음은 아니었다. 집에서도 종종 혼자 술은 마셨으니까. 집에서 혼자 마실 때는 소주, 와인, 맥주를 가리지 않았었다. 다만 소주가 좋아 소주를 선택하는 날이 더 많았을 뿐.
어쩌다 하루에 반 이상을 기거하는 스튜디오에 혼자 남았다. 오후 7시를 넘은 시간에 혼자 있는 건 처음인 것 같다. 함께 기거하는 다른 분들은 제각기 일정이 있어 외출했기 때문이다. 최근 스튜디오에 회계 담당 및 매니저로 취직하며 월급으로 월세를 제하는 대신 주급으로 술을 받기로 했었는데, 오늘이야 말로 그 주급을 받자고 마음먹었는데, 정작 주급 주실 분이 홍대 인근 어느 카페에서 독서 삼매경에 빠져 계시는 바람에 기다리다 못해 스튜디오 냉장고에 곤히 잠들어 있던 MAX를 꺼내 들었다.
fantastic scar pink의 첫 번째 프로젝트 ‘fairy pitta’ 출간 후 책에 실린 배우들이 스튜디오를 찾아와 술자리를 가졌는데, 그 때 마시고 남은 MAX가 자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남들이 ‘치맥’을 주장할 때에 나는 외로워도 슬퍼도 ‘치소’를 주장해왔는데, 오늘은 ‘치맥’에 도전해 보고 싶었다. 그가 마감 후 회식으로 닭볶음탕을 먹게 되었다고 이야기했기 때문에 닭고기가 먹고 싶었던 것은 아니다. 그냥 오늘은 닭고기가 먹고 싶었다. 그래서 주급 주실 분을 기다렸지만…. 어쨌든,


맥주는 마시면 마실수록 배가 부르니까, 하고 그냥 MAX만 옆에 두고 있다. 사실 딱히 먹고 싶은 것도 없었고, 혼자인 마당에 음식을 배달시키기도 부담스러웠고, 주전부리를 사러 나가는 건 귀찮았다. 물론 전화를 걸어 주급은 언제 줄 것이냐, 왜 카페에서 책은 안 읽고 잠들어 버린 것이냐, 혹시 여자를 꾀고 있는 것은 아니냐, 항의를 했을 수도 있겠지만 아랫사람으로서 윗사람의 사생활까지 간섭한다는 게 좀 꺼려졌다. MAX는 반쯤 마시던 것인데도 고소한 게 제법이다. 안주로 쓸만한 과자 부스러기가 몇 있긴 하지만 나는 과자 부스러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저 고기, 고기, 고기! 아… 그러고 보니 요즘 고기게이지가 많이 떨어졌다. 삼겹살이라든가, 삼겹살이라든가, 돼지갈비라든가, 돼지갈비라든가…. 소고기는 즐기지 않는다. 돼지고기, 돼지고기, 닭고기, 그리고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소고기. 돼지고기라면 부위도 가리지 않는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내장도(곱창 막창 따위는 매워서 싫지만 삶은 것이라면 OK), 등뼈도, 족발도, 진심으로 사랑한다. 매일매일 고기만 먹고 살 수는 없을까. <생방송 오늘의 아침>에선 기적의 밥상으로 각종 채소를 올리던데, 채소의 필요성을 느끼고는 있지만, 채소도 맛있다는 걸 조금씩 알아가고 있지만…. 고기 사랑이 사람을 필요 이상으로 본능에 충실하게 만드는 것 같아서, 조금은 폭력적으로 만드는 것 같아서, 자제하고 싶기도 하지만….
안주도 없이 MAX에 손을 대게 된 건 글 때문이다. 마감이 얼마 남지 않은 원고는 둘째치고라도 자꾸, 거꾸로 가는 느낌이다. 거꾸로 가는 건 연어로 충분하다. 적어도 연어는, 맛있기라도 하지. 답답한데 어데 하소연할 곳은 마땅찮고, 어차피 내가 아니면 해결해 줄 수 없는 문제이니 술이라도 먹이고 정신 차리라고 호되게 을러메는 수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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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izayo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