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2. 24. 19:34
종가집 묵은지 500g, 삼겹살 400g, 새송이버섯 3개, 마늘과 프랑스에서 건너온 이름모를 향신료, 그리고 소금 약간


오랜만에 어머니께서 급습을 하셨다. 느즈막이 일어나 커피와 담배를 즐기고 있던 그와 나는 호되게 놀라 페브리즈를 쏟아 부었으나, 어머니는 금세 눈치채셨고, 그가 다 뒤집어쓴 채 1시간 가량 각종 잔소리 세트를 선물 받았다. 어머니의 잔소리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 것은 음식이었는데, 제발 밥 좀 해 먹으라는 것이 주요 골자다. 생활비도 가물고, 어머니의 잔소리에 자극도 받고, 모처럼 음식을 해먹기로 했다.
그래서 집에 가는 길에 재료 일체를 구입했다. 사실 무얼 만들어야 좋을지 몰라 동네 마트를 서너 차례 배회한 끝에 묵은지 찌개를 해 먹자는 결론을 내리고 재료를 구입한 것인데, 갑작스럽게 결정된 메뉴인만큼 자신이 좀 없었다. 얼마 안 되는 재료를 손질해 드디어 묵은지 찌개를 만드는 동안, 나는 왜 항상 술안주를 만들고 있는 것인가에 대해 잠시 고민했다. 밥 반찬을 만들겠다고 시작해놓고 완성된 것을 보면 늘 술안주였고, 늘 밥과 함께 술을 마시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와중에도 묵은지 찌개는 끓고 끓어 완성되었고, 상차림을 마쳤을 때, 그는 묵은지 찌개보다는 담배를 피우고 먹을 것인가 먹다가 담배를 피울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었다. 그리고 첫 술. 그의 첫 마디는 ‘기름지다’였다. 그랬다. 갑자기 결정된 요리에, 아무 생각 없이 목살 대신 삼겹살을 넣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 한 말은 ‘목살을 넣었으면 더 좋았겠지만 맛있다’였다. 나는 별다른 내색 하지 않은채 묵묵히 술과 찌개를 입에 퍼 넣으며 생각했다. ‘네가 할 수 있는 말은 맛있다, 진짜 맛있다, 다음에 또 해줘 밖에 없다고 일러줬을텐데’라고. 점점 어두워지는 표정을 발견한 그가 물었다. 그래서 생각했던 대로 대답했다. 비판은 겸허히 받아들이겠으나, 첫 마디가 비판이어선 안 되는 거라고. 그는 맛 없다는 게 아니니 그게 뭐 그리 대수냐는 반응을 보였다. 맛 없는 것을 맛있게 먹어도 모자랄 판에, 당당하기만 한 그 앞에서 나는 또 한 번 짧은 한숨을 내쉬며 읊조렸다. 그래, 교육은 백년지대계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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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1. 14. 16:10
그런 날이 있다. 술을 마시고 싶기는 한데, 안주 챙길 것이 귀찮고 그렇다고 안 마시자니 허전하고, 지갑도 가벼워서 누군가를 불러낸다는 게 더러는 귀찮고 더러는 미안하지만 그렇다고 안 마시자니 섭섭하고. 좀 드물기는 하지만 그런 날이 있고, 그런 날이면 편의점에서 맥주나 화려한 옷을 두른 알코올 소다수를 사 마시곤 한다. 어제는 저녁을 잔뜩 먹고 배가 불렀기 때문에 맥주는 손에 잡히지 않아 스미노프 레몬 소다수를 마셨다. 어쩐지 새빨간 라벨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코카콜라를 제외하고, ‘빨간 딱지’가 붙은 제품을 선호한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는 책등에 붙은 빨간 딱지, 미끈하게 빠진 라이카의 검은 몸에 붙은 빨간 라벨, 말보로 플레이버의 뽀얀 얼굴에 새겨진 빨간 네모…. 생각해 보면 더 많겠지만 여기까지.
스미노프의 첫 모금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기도 전에 후회했다. 아무리 배가 불러도 맥주를 마시거나 아무리 귀찮아도 소주를 마셨어야 했다고. 혀끝에선 어떤 알코올의 징후도 느껴지지 않았다. 새빨간 라벨에 낚였던 것이다. 모종의 배신감에 손에 잡히는 것도 눈에 들어오는 것도 없어, 애꿎은 술병을 가만 바라보다 문득, 혼자 마시는 술이 외롭게 느껴지는 건 알코올 함량이 턱없이 높거나 낮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젯밤엔 잠깐, 외롭다고 느꼈던 것 같다.



사실, 스미노프 소다수에겐 잘못이 없다. 소다수라고 씌어 있었으니까. 소다수를 잘못 이해하고 빨간색에 혹한 내 잘못이다. 얼마나 크고 아름답든 머지않아 거품처럼 스러질 것이 ‘기대’라는 것을, 잠시 잊고 있던 내 잘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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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12. 23. 14:52
화요일엔 술을 마시고 싶지 않았다. 월요일에 낮부터 마셔댔고,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고, 술로 연말 분위기 내는 것은 이제 그만,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들은 녹록치 않았다. 보이지 않는 손이 내 목덜미를 잡아채었고, 그렇게 버티다가 약속 시간보다 한 시간 정도 빨리 도착해 왜 안 나오느냐고 성화를 부리다, 시간 많은 티 내지 말라고 B에게 한 소리 들었다. 어쨌든 송년 모임을 가장한 화요일의 술자리. 누구는 어제 먹은 술안주가 00라서, 누구는 오늘 점심에 먹은 메뉴가 00라서, 안주를 정하는데 약간의 불협화음이 있긴 했지만 송년모임의 취지는 역시 술과 사람이었으므로, 대통합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이날은 B와 P와 G와 A와 H와 나를 포함해 여섯 명의 여자들이 옹기종기 술잔을 기울였다. 보쌈족발 세트와 기본안주로 나오는 감자탕과 묵은지갈비찜을 안주삼아 서로에게 애교를 부리고 추임새도 넣어주고 깔깔깔 웃으면서 소주 네 병(혹은 다섯 병)과 맥주 세 병(혹은 네 병)을 비웠다. 어깨 동무를 하고 이차로 옮기는 사이에 놀랍게도 P가 집으로 돌아갔고, 무사히 보내줄 수 없어 가방도 뺏어보고 협박도 해보고 애교도 떨어보았지만 결국엔 집으로 가는 그녀의 등을 토닥여줄 수 밖에 없었다. 서른 넘은 여자는 멈출 줄도 알아야 하니까, 라는 이유 때문은 아니고 그냥 쉬게 해주고 싶었다.

사진을 찍는 동안 여자들은 발을 동동 구르며 빨리 찍으라고 성화였다. 실험적인 사진을 위해 한껏 멋을 부려 찍은 보쌈족발 셋트. 최고예요! 이름 모를 여성의 사진은 이차로 옮기던 중 '나 이거 좋아!'하면서 찍었는데, 이 전단지가 붙은 전봇대 뒤쪽에 있던 커플이 플래시에 깜짝 놀랐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리고 이차. 양념반후라이드반을 묵묵히 먹어치운 A, 그 와중에 온갖 애교를 구사하며 우리를 웃게 했던 H, 그런 H를 무사히 집에 옮기느라 고생했던 A, 반 강제로 택시에 태워져 또 맥주를 마셔야했던 G, 한 번 마시면 끝장을 봐야만 하는 B, 여우 같은 포메라니안을 입양해 예삐란 이름을 지어준 P, 그리고 어쩐지 들떠 택시 안에서도 사진을 찍어댔던 나. 한참을 깔깔대고 웃다가 문득, 이 여자들이 고맙고 대견하고 안쓰러워서 울 뻔했다. 언제 피었는지 피게 될지 자신은 알 수 없어도 서로에게 '너 지금 피어있어'라고 이야기 해줄 수 있는 그런 여자들. 앞으로도 계속 같이 늙어갔으면 좋겠다. 소주 1병이던 주량이 반병으로 줄고 또 한 두잔으로 줄때까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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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12. 21. 16:44
 
B는 술을 좋아한다. 아니, 사랑한다. B를 따라가려면 멀었다고 생각한다. 오래전부터 B와 낮술을 마시자는 약속을 했는데, 그 약속을 어제야 지킬 수 있었다. 운전도 할 줄 아는 멋진 여자, B와는 합정 근처에서 만나기로 했었는데, 약속 전날 B는 전화를 걸어와 '여기저기 돌아다니기 귀찮으니 집에서 먹자'며 '족발 시켜 줄게'라고 나를 꼬여냈다. 낚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B와 나는 공식적으로 백수였고, 백수는 돈을 아낄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마다해선 안 되니까.
그녀의 집에 도착해 족발이 오기를 기다리며 김치전을 만들었다. 뭔가 돕고 싶었지만 요리도 잘하는 B는 정중히 거절했다. 첫번째 김치전이 다 익었을 때 족발이 도착했고, 냉동실에서 B가 넣어두었던 소주와 소주잔을 꺼내며 그녀의 남다른 센스에 또 한 번 감탄했다. 이 여자, 소주를 사랑하고 있어!
오순도순 음악을 들으며 술잔을 기울였다. 주부이기에 할 수 있고 주부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들을 나누며, 소주 두 병을 비웠다. B는 술 마시고 요리하고 집안 살림 살뜰히 보살피는 재주 외에도 적재적소에 추임새 넣는 재주도 있었다. 그저 그런 이야기도 감칠맛나게 바꿔주는 그 추임새라니!
해질무렵, 소주 두 병을 말끔히 비웠을 때, B는 나가자고 했다. 집 근처에 새로 생긴 오뎅바에 가자고 했다. 우리는 자리를 옮겨 소주를 마셨다. 오물오물 오뎅을 씹고 소주를 삼키던 중, B의 짝꿍이 퇴근했음을 알려왔고, 자연스럽게 술자리가 파했다.
집에 오는 길, B에게는 배울 것이 참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술이라든지, 살림을 바라보는 관점이라든지, 우리들은 비슷한 점이 많으니 비교적 쉽게 배울 수 있을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B와 같은 술친구가 있어 참, 행복했던 하루였다.


◁ 옵션이 없어 더욱 맛좋은 족발. 그녀는 참이슬을 고집하고 나는 처음처럼을 고집해 둘이 마시면 각 1병씩 앞에 두고 마시곤했는데, 최근 B가 처음처럼으로 전향했다는 반가운 소식을 전하며.
Posted by izayoi
2010. 12. 14. 17:12
그가 다니던 회사의 상사 D를 만나는 자리였다. 그가 직장 동료들과 술을 마시면 염치 없이 끼어들곤 해서 어지간한 직장 동료의 얼굴과 몇몇은 연락처까지 알고 있는 극성 마누라이기 때문은 아니고, 그저 술자리를 찾아 헤매는 외로운 애주가랄까. 그렇다고 술자리마다 끼어드는 건 아니니 자격지심을 가질 필요는 없겠다. 아무튼 어제도 그가 D를 만난다기에 술값이 부족하지는 않은지, 부족하면 언제든 전화하고 즐겁게 마시고 오라고 했었다. 분위기 봐서 부르라는 말도 곁들이고. 이 말은 한 시간쯤 후에 술값이 부족할 경우 직접 달려가 계산해 주겠다는 말로 바뀌었고, 그냥 합석하라는 답을 받기에 이른다.

D 앞에서 차마 새우튀김을 찍을 수 없어 화장실 핑계로 밖에 나와 횟집 외양을 찍었다. PPL은 싫지만, 이민정은 예쁘니까, 하면서.

한편, D는 회를 즐기는 이라 술을 마시면 대개 횟집에서 술을 마시곤 한다. 회 한 접시와 새우튀김과 참이슬이 홍대 단골 횟집의 단골메뉴. 새우튀김은 고맙게도 회를 즐기지 않는 나를 위한 대안이었고, 내가 합석하는 날이면 D는 늘 새우튀김을 주문해 주곤 했다. 어제도 회 한 접시와 새우튀김 한 접시를 놓고 술자리가 이어졌다. 마누라가 젓가락이 있거나 말거나 -아마도 술잔 있으면 그걸로 됐지 뭐, 하는 식이었을 것이다- 무심한 그와 D와 술을 마셨다. 나중에 보니 나를 위한 수저가 테이블 한 쪽에 있었지만 팔이 닿지 않았고, 팔을 뻗거나 그의 옆구리를 찌르기도 귀찮고, 안주도 안주니 만큼 그냥 손으로 집어 먹었다. 사실, D는 상당한 애주가로 그가 함께 일하던 시절 매일 술을 먹여 그는 급성 간염에 걸려 노란 인간이 되었던 일이 있어서, 차라리 나를 먹이라는 심정으로 술자리에 합석하곤 했었다. 다른 나이든 사람과 달리 새로 꾸린 일의 성과를 자랑하는 D의 이야기가 듣기 싫지 않은 건, 나이가 많은 사람들에게 일단 접고 들어가는 성격 때문이 아니다. 그냥, 듣고 있으면 듣고 있어도 좋을 이야기들을 많이 한다. 차곡차곡 쌓은 경력을 딛고 자신의 영역 안에서만큼은 누구에게도 자신감을 잃지 않을 D의 모습에서 나이 잘 먹는 방법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D와 그는 서로의 근황과 업계 이야기와 인터넷 등등에 대해 이야기했고, 나는 전작이 없다는 이유로 계속 참이슬 원샷 한 번에 새우튀김 하나를 먹으며 헤실헤실 웃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시간은 어느덧 새벽 3시. 그와 나의 바람대로 내 지갑에서 꺼낸 돈으로 술값을 치르고, 자신의 관자놀이 옆에 브이를 그리며 멀어져 가는 D의 뒷모습을 배웅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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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12. 13. 13:07
이유없이 울적한 날이 있다. 하늘은 낮고, 낮부터 알코올 냄새를 맡기 위해 코를 킁킁거리게 되는 그런 날. 그런 날이면 메신저 친구 목록과 전화번호부와 각종 소셜 네트워크 사이트를 수시로 들락거리며, 최대한 고급스럽게 술자리를 만들기 위해 애쓴다. 시간 많은 티는 내지 않으면서 적당히 ‘센치한 척’ 하면서 수중에 지폐 몇 장 없는 빈곤을 수수한 모습으로 바꾸면서 술 마실 수 있는 기회를 만드는 것이다. 생각보다 꽤 공을 들여야 하고, 조금 짜증이 나기도 하고, 상대의 반응에 따라 감정 기복이 심해지고, 약간 피곤한 과정이다. 그러한 과정을 거쳐 M의 제안으로 홍대번개추진위가 꾸려지고, M과 나는 주변인들을 포섭하기 시작했다.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미끼를 덥석 물어준 A와 K를 홍대로 불러들이고 K와 먼저 접선하여, 떡볶이를 먹으러가다 말고 또다시 삼팔이네로 갔다(삼팔이네의 원래 이름은 삼삼이네, 1인분에 3300원하던 시절의 이름인데, 3800원으로 가격이 오르자 내 멋대로 삼팔이네로 바꿔 부르고 있다).

먹고 또 먹어도 좋은 안주. 내 고기 사랑의 깊이를 아는 K의 배려로 또 찾아갔다. 그러나 기분이 무거워져, 고기에게 미안한 마음 뿐이다.


시작은 좋았다. M과 A와 K와 나는 제법 화기애애하게 고기를 굽고 먹고 술을 마셨다. 고기와 함께 소주를 마실 때까지만 해도 별다른 이상 징후는 보이지 않았다. 늘 그래왔던 것처럼, 우리들이 한 두번 술을 마신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더더욱, 화기애매하지도 않게 즐거운 술자리를 만들어갔다. 얼큰하게 술이 들어가고, 배가 부르고, 자리를 옮겼다. 옮긴 자리에서는 오징어회와 오징어 튀김을 먹었는데 오징어가 별로 매력적이질 못했다. 아무리 회라지만, 채소를 채 썬 것보다 섬세하게 채썰린 오징어회와 과하게 기름진 오징어 튀김은 도통 소주와 어울리질 못했다. 하지만 모처럼 오랜만에 속엣말을 꺼낼 기회가 있었고, 새로운 인물 L이 합석했다. 어쩐지 여기서부터가 문제였지 싶다.
아는 사람 하나 없을 때는 극도로 낯을 가리고, 그래도 아는 사람이 한 둘쯤 있으면 조금 덜 낯을 가리는 나는, 새로운 인물이 제 아무리 술을 사랑하고 즐긴대도 그다지 달갑지 않은데, 그래서였나(여기서 ‘안다’의 기준은 1년 이상 거의 매일 얼굴을 보다시피하고, 그게 아니라면 적어도 10회 이상 술자리를 함께 한 경우를 이른다. 이 기준을 채우지 못하면 티가 안 난다고 믿고 싶기는 하지만 조금, 어색해하는 경향이 있다). 아니면 또 주변인을 도마 위에 올려 다지고 다지고 또 다져서인가. 그것도 아니면 이어진 3차에서 (어의 없게도) 처음 보는 보드카를 마셨기 때문일까. 늘 그렇듯 제법 멀쩡한 행색으로 집에 돌아왔고, 잠이 들었는데 다음날 눈을 떴을 때는 참을 수 없이 무거워진 기분 앞에서 당황하는 내 모습을 맞닥뜨려야 했다. 그리고 그 무거운 기분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 날 이후로 지금까지 지난 29년간 곱씹었던 단점을 모조리 꺼내 윤이 나게 쓸고 닦았는데도, 가벼워져야 할 기분은 여전히 무겁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폭주하는 손가락을 어디 묶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데, 일단 이 기록은 작성하기로 했다. 여기에 하나 더 보태 생각하지 않기로 한 것도 생각하지 않을 때까지 술을 잠시 쉬어야 하나 고민 중이다. 그럴리는 없겠지만. 여튼, 시작이 좋았어도 끝이 개운치 않은 술자리는 달갑지 않다. 전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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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12. 6. 17:37
꽤 오랜만에 K와 찜질방에 갔다. 소중한 내 피부를 위한 결정이었으므로, 찜질방이 신림에 있다한들, 가지 말아야 할 이유는 없었다. 찜질방에 도착하자마자 미역국과 제육덮밥을 해치우고 냉커피 한 통을 들고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땀을 빼고, 맥반석 달걀 세 알과 냉녹차 한 통을 해치우고, 세신 예약을 한 뒤 무한도전을 보았다. 꽤 오랜만에 몸을 맡겼는데, 아줌마는 내 등에 사는 고양이 미오를 탐탁치 않게 여겼다(고양이 주제에 누워 있으며, 도무지 개인지 고양이인지 알아보기가 힘들다는 게 그 이유일 것으로 추정한다). 그렇게 장장 7시간을 찜질방에서 보내고 나왔다. 당연하게도 배가 고팠고, 우리는 K의 집 근처에 있는 단골 포차로 이동했다.

매운 것이 조금 흠이지만 무려 오겹살이 들어간 돼지김치볶음과 쫄깃한 수제비가 푸짐한 깔끔한 조개탕. 이 집의 단골인 K를 알고 있어 행복할 정도다.


우리는 내가 사랑하는 돼지김치볶음과 K가 사랑하는 깔끔한 조개탕, 소주 한 병과 맥주 500cc 한 잔을 시켰다. 사장님은 K를 알아보고 돼지김치볶음을 푸짐하게 내 주셨고, 반쯤 먹은 깔끔한 조개탕을 데워 주시며 수제비를 추가해 주셨다. 단골을 겪하게 아끼는 사장님 덕분에 K와 나는 정말 든든히 먹고 마실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들은 가족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술자리에서의 화두는 언제 어떻게 튈지 모르는 것이므로, 가족 이야기가 나왔다고 해서 놀라울 것은 없었다. 소설과 주변인과 가족 이야기가 돼지김치볶음처럼 빨간 고추장에 범벅이 되어 우리들의 입 속으로 넘어갔다. 오물오물 안주와 자랑할 것 없는 가족사와 예쁠 것 없는 주변인을 집어 삼키면서 우리는 어떤, 동질감을 느꼈던 것 같다. 유유상종 네 글자로 묶일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연대의식이랄까. 소주 한 병과 맥주 500cc 두 번째 잔이 비어갈 때쯤 M과 A가 합류했다. 주변인과 주변인의 주변인에 대한 이야기를 서비스로 나온 파전과 추가로 시킨 꼬막과 함께 주워섬기곤 집으로 돌아갔다. 술김에 사과가 어쩌구 하는 글을 페이스북에 올렸고, 이틀 뒤 그 사과 어쩌구 하는 글을 다시 보곤 술 먹고 주정 부리지 말자는 생각을 했다. 이 글을 쓰기 위해 다시 열어 본 돼지김치볶음과 깔끔한 조개탕은 여전히 사랑스럽고, 심지어 배가 고파진다. 하아.
Posted by izayoi
2010. 12. 1. 17:13
그와는 하도 술을 마셔서 특이할 것도 새로울 것도 없다. 그런데 희한하지, 마셔도 마셔도 해야 할 이야기가 많다. 그래서 하루가 멀다하고 술을 마시게 되는데, 어제는 뭔가 집중해서 술을 마시기 위해 집 밖에서 술을 마시기로 했다. 집 근처에 있고 저렴하다는 이유 때문에 자주 찾는 술집 가운데 한 곳으로 닭고기가 대표메뉴지만, 정작 닭고기를 먹은 적은 별로 없는 것 같다. 맛이 없어서가 아니라 다른 안주보다 딱 소주 한 병 값이 더 비싸기 때문이다. 자금이 넉넉하면 닭고기를, 부족하다 싶으면 모듬소세지를 먹는다. 그래서 어제도 모듬소세지를 먹었다.

아, 맛있는 모듬소세지. 소세지마다 약간 맛이 달라 먹는 재미가 쏠쏠, 소주 도둑 중 하나로 꼽기에 손색이 없다.

보통 소주 한 병이면 마무리되는 술자리지만 어제는 두 병을 비웠다. 그는 새로운 직장에 대한 이야기, 나는 글 이야기를 했지만 대미를 장식한 것은 처세술이었는데, 매우 드물게 그는 내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앗싸!). 그는 이야기를 들을 때 습관적으로 고개를 빠르게 끄덕이곤 하는데, 그건 반론의 여지가 많다거나 재미없다는 표시다. 그에게서 최상의 반응을 이끌어내고, 다시 생각해도 조금 멋있게 느껴지는 내 이야기는, 뒷담화를 하는 이유가 그 사람이 내가 갖고있지 못한 것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는 요지의 내용이었다. 아, 이 얼마나 슬픈 일인지. 그 사람이 그토록 미웠던 이유가 내가 갖고 싶은 장점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니. 심지어 그 사실을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야 깨닫게 된다는 것마저 슬프다. 그 사람과 더 잘 지낼 수 있었는데, 그 사람과 더 멋지고 재미있는 것을 만들 수 있었는데, 단순한 시기 질투로 포장된 나의 비루함 때문에 다 어그러지다니. 이래서 사람은 참 약하다, 어리다. 늘 보람찬 술자리지만 유독 보람찼던 술자리였다.
Posted by izayoi
2010. 11. 29. 15:52
꽤 오랜만에 그녀를 만났다. 서로 바쁘기도 했고, 노느라 바빠 게으름을 피운 덕에 전부터 만나자는 이야기가 오가기는 했지만, 장소를 두고 의견이 좁혀지지 않아 만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그날 그녀는 조금 우울해했고, 저렴한 가격에 두툼한 생삼겹살을 먹을 수 있다는 말에 솔깃했고, 다소 먼 거리임에도 기꺼이 그녀가 홍대로 나와주었고, 감격적으로 만날 수 있었다. 합정역 3번출구라는 접선장소에서, 그녀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는데, 알아보자마자 그녀는 '헤어 웰컴'이라며 마구 웃었다. 미소나 손짓 대신 머리로 인사를 한다는 거였는데, 저녁을 먹을 즈음엔 익숙해졌는지 잘 어울린다는 칭찬까지 해 주었다.

농장직영이라 저렴한 가격, 두툼한 생고기를 공급할 수 있었던 삼팔이네의 고기와 김치와 소주.


온갖 짐을 바리바리 들고온 그녀를 이끌고 간 곳은 갖가지 추억이 깃든 삼팔이네(원래 삼삼이네였는데 고기 가격이 오백원 오르는 바람에 삼팔이네로 바뀌었다. 물론, 혼자 부르는 상호이니 혼동하지 않기를). 전날 밤을 꼬박 뜬 눈으로 지새고, 아침 한 끼로 추위와 싸웠던 나는 공기밥까지 추가해 게걸스럽게 먹어치웠고, 이에 질세라 그녀 또한 맥주를 섞어가며 맛있게 먹었다. 철판 위에는 생삼겹 말고도 A, B, C, D… 등 우리가 함께 알고 있거나 각자 알고 있는 사람들의 이름이 올라가 고기와 함께 구워지기도 했다. 다음 주말에는 꼭 함께 때 밀러 가자, 그러고 보면 우리는 참 별난 인연이다. 새삼스럽게 인연의 소중함을 느끼곤 콩나물과 김치와 상추를 서너번쯤 리필하고 고기 1인분을 더 구워 먹었다. 나보다 나이가 어리지만 친구 같은 그녀와 각자 맥주 한 병과 소주 한 병을 비운 뒤 우리는 커피를 마시러 갔다.

신림에 사는 그녀가 좀더 쉽게 돌아갈 수 있도록 합정역 근처의 카페에서 커피와 치즈케이크를 먹고 마셨다. 그녀와는 어쩐지, 사회에 나와 만난 사람 사이에 쉽게 만들어지지 않는 어떤 유대 같은 것이 있는데, 아무래도 그녀와 내가 둘도 없는 목욕 친구가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여자들은 화장실은 같이 가도 목욕탕은 좀처럼 같이 가지 않는데 -그 이유는 잘 모르겠다. 모두 까발려야 하는 목욕탕의 특성과 모두 까발리고 싶어하지 않는 여자의 특성이 맞부딪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녀와는 함께 놀러간 월미도에서 샤워로 안면을 트고 찜질방을 전전하며 때목욕 친구로 발전을 거듭해왔다. 눈 앞에 없는 사람에게는 매우 게으른 나이지만 그녀라면, 그녀만큼은 오래오래 때목욕 친구로 남고 싶다.





◁ 합정역 근처 용다방의 커피와 치즈케이크. 여기서 커피를 마시면 어쩐지 보약을 마시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Posted by izayoi
2010. 11. 24. 18:04
그런 날이 있다. 책상 아래로 스민 한기가 발목을 휘감아 돌면 나가지 않을 수 없다. 향하는 곳은 술 파는 곳, 어디라도 간다. 아직 술 파는 곳에 혼자갈만한 내공을 쌓지 못해 일행을 구했다. K에게 제안하자, K는 L도 부르자고 했다. K의 친구가 운영하는 술집에 가서 오뎅탕과 소주를 시키고, L은 축구 연장전이 끝나면 나오겠다고 했다. 오뎅탕이 나오기 전에 3잔의 술을 비웠고, 기본 안주로 나온, 어딘가 빈티지한 두부 같은 접시에 담긴 두부를 먹었다. 오뎅탕이 나온 그 순간 L이 나타났다. 오뎅탕은 맛있었지만 오뎅 개수가 몇 안 되었고, 배가 고팠던 우리는 고기 빈대떡을 추가했다. 고기 빈대떡이 사라질즈음 서비스로 석화 한 접시가 나왔다. 역시, 인맥이란, 소중한 것이다. 석화 한 접시를 모두 비우고도 모자라 고기 빈대떡을 추가했다. 연평도니 전쟁이니하는 이야기들을 나누었고 자정을 30분 정도 넘긴 시간, K의 계산을 끝으로 1차도 끝났다.

뭔가 빈티지한 두부 그릇 속의 두부와 오뎅탕의 잔해. 작은 표고버섯의 3분의 1이 남을 때까지 오뎅탕 찍을 생각을 못했다.


K와 나는 1차 계산을 서로 하겠다고 가벼운 실랑이를 벌였고, 승리한 K가 2차를 제안했고, 우리는 또 다른 술집으로 몰려갔다. K는 맥주를, L은 라즈베리 주스를, 나는 라즈베리 보드카를 마셨다. 우리는 어느덧 어두운 세상 일은 잊고 연애 이야기에 몰두했다. 나는 어쩐지 K가 L에게 단순한 호감 이상의 호감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는데, 혼자만의 생각이므로 더 없이 즐거운 상상이었다. 연장전을 보고 오겠다는 L을 기다리며 독촉하던 K의 모습에서부터 이 발칙한 상상이 시작됐는데, L은 K의 관심을 아직 눈치채지 못한 듯 했고, K는 L에 대한 호감의 성분을 분석 중인 듯 했다.


먹고 또 먹어도 맛있던 고기 빈대떡과 서비스로 나온 석화. 석화는 예의상 하나만 먹었다. 난 해산물을 좋아하지 않으니까.


사람들과 술을 마실 때 가장 재미있는 것이기도 하다. 함께 마시니 함께 즐거워야겠지만, 함께 있어도 외로운 나는 늘 남자와 여자 사이에 흐르는, 흐르고 있을지도 모르는 애정전류를 상상하며 혼자 즐거워 한다. 내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K와 L이 알면 펄쩍 뛰겠지만, 나는 그 두 사람이 연애를 하든 각자 다른 사람과 연애를 하든 연애를 했으면 좋겠다. 혼자 있기에는 너무 아까운 사람들이고, 술만큼이나 재미있는 것이 연애니까.


Posted by izayo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