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11. 14. 22:09

 

기필코 저녁을 얻어먹고야 말겠다는 일념으로, 또 배가 덜 고프기도 했기 때문에 저녁도 마다하고 일을 했다. 일인 즉슨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접겠다던 디자인일이었다. 그래도 맡긴 사람들이 좋아서 또 인디자인 프로그램을 열고 사진과 글자들을 이리저리 배치하고 있었다. 그런데 저녁을 얻어먹을 수 없게 되었고, 배는 고픈데 얻어 먹을 생각으로 약속이 있다거나 이미 먹었다거나 하는 핑계를 흩뿌려 놓았고, 야식 핑계 삼아 집에 가는 길에 편의점에 들렀다.

편의점마다 구비해 두는 맥주란 고만고만한 것이지만 처음 보는 맥주가 냉장고에 1열 종대로 앉아 있었다. 요즈음 사진수업의 과제 주제가 빨강이었으므로, 또 대문자로 박힌 irish라는 단어가 마음에 들었으므로, 이름도 제대로 못 읽는 주제가 이 맥주를 덜컥 집어들고 다 먹지도 못할 안주거리를 사서 집으로 돌아왔다. 맥주 맛이란 그저 톡 쏘는 느낌이어서, 이런 맛이라면 C 맥주의 광고 카피가 잘 어울리는 맥주는 C 맥주가 아니라 이 맥주라는 생각을 했다. 한 캔을 모두 마시는 동안 고작 작은 컵라면 하나를 간신히 비웠다. 다 먹어치우고 말리라 호기롭게 샀던 매운 족발은 너무 매워서 한 점도 다 먹을까 말까. 맥주를 끊겠다던 다짐은 애써 고양이들 뱃살 밑에 숨겨버리고, 남은 맥주를 홀짝홀짝, 남은 밤을 홀짝홀짝 그렇게 홀짝거렸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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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izayo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