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11. 14. 22:24

 

 

더 이상 채울 수 없을 것 같다고 느꼈다. 몸 속에 수분이 차고 넘쳐, 조금이라도 비워내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느꼈다. 내 ‘상태’에 가장 많은 관심을 쏟고 있던 K를 만났다. 그녀가 먼저 나와 함께 만두가 먹고 싶다고 손을 내밀어 주었고, 우리는 ‘중간 지점’인 이태원에서 만나기로 했다. 벼르고 벼르던 만두 가게에서 맥주와 이과두주를 두고 고민하다, 메뉴를 정하며 -우리는 뜬금없는 우박을 함께 맞으며 약간 고무되기도 했었다- 순식간에 맥주에서 이과두주로 주종도 바꾸고 독주를 들이붓기 시작했다.

이과두주라기 보다는 고량주로 더 친숙한 중국산 독주는, 의외로 사과향이 났고 한 입에 털어넣기 좋았으며 두 병째를 비우는 와중에도 취하지 않았다. 결국 세 병을 비우고서야 카페로 자리를 옮겼고, 충동적으로 네일샵에 가 그녀도 나도 태어나 처음으로 네일케어를 받았다. 영업이 끝나갈 무렵 취기가 오른 채로 가게를 찾아간다는 게 조금 걸렸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뭐든, 해야만 했다. K는 기꺼이 나를 위해 자신의 시간을 내주었고 그런 K를 다시 카페로 데리고가 앉혀두고 조금 울었다. 여자들이 우는 이유란, 아무 것도 없다. 이유가 너무 많기 때문일 것이다. 너무 많아서 하나도 알 수 없는 이유로 나는 울었고, K는 붉어진 눈시울로 내 눈물을 닦아주었다. 편곡 작업을 해야 한다는 그녀를 카페에 남겨두고 지하철 막차를 타고 돌아와 잠에 드는 순간 내가 모르는 K의 시간들에 질투를 했던 것 같기도 하다. 자신의 핸드폰 주소록에 ‘우리시대작가’라는 수식어를 붙여 내 번호를 저장해 둔 K와, 매일 아침 성경 한 귀절을 전송하는 K와, 내 삼시 세끼를 염려하는 K와, 내 숙면을 걱정하는 K와, 내 어깨 위에 얹힌 일들을 미워해주는 K와, 아름다운 밤을 보내고 이과두주 뚜껑 세 개가 남았다. 손톱에는 검은 물이 들었고, 그득하던 수분이 조금 덜어졌다. 그 어느 해보다 가혹한 11월이 조금은 따뜻했던 그런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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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11. 14. 22:09

 

기필코 저녁을 얻어먹고야 말겠다는 일념으로, 또 배가 덜 고프기도 했기 때문에 저녁도 마다하고 일을 했다. 일인 즉슨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접겠다던 디자인일이었다. 그래도 맡긴 사람들이 좋아서 또 인디자인 프로그램을 열고 사진과 글자들을 이리저리 배치하고 있었다. 그런데 저녁을 얻어먹을 수 없게 되었고, 배는 고픈데 얻어 먹을 생각으로 약속이 있다거나 이미 먹었다거나 하는 핑계를 흩뿌려 놓았고, 야식 핑계 삼아 집에 가는 길에 편의점에 들렀다.

편의점마다 구비해 두는 맥주란 고만고만한 것이지만 처음 보는 맥주가 냉장고에 1열 종대로 앉아 있었다. 요즈음 사진수업의 과제 주제가 빨강이었으므로, 또 대문자로 박힌 irish라는 단어가 마음에 들었으므로, 이름도 제대로 못 읽는 주제가 이 맥주를 덜컥 집어들고 다 먹지도 못할 안주거리를 사서 집으로 돌아왔다. 맥주 맛이란 그저 톡 쏘는 느낌이어서, 이런 맛이라면 C 맥주의 광고 카피가 잘 어울리는 맥주는 C 맥주가 아니라 이 맥주라는 생각을 했다. 한 캔을 모두 마시는 동안 고작 작은 컵라면 하나를 간신히 비웠다. 다 먹어치우고 말리라 호기롭게 샀던 매운 족발은 너무 매워서 한 점도 다 먹을까 말까. 맥주를 끊겠다던 다짐은 애써 고양이들 뱃살 밑에 숨겨버리고, 남은 맥주를 홀짝홀짝, 남은 밤을 홀짝홀짝 그렇게 홀짝거렸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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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10. 15. 16:40

 

깊은 밤, 날짜는 무의미하다. 불면과 소화불량으로 시간은 흐트러졌고, 그러는 동안 술에서 한 걸음쯤 떨어져 지냈고, 하루에 두 세 개의 일을 처리하는 날들이 이어졌고. 그러다 보면 날짜와 시간은 지워지고 낮과 밤만 남는다. 그 밤 중에 어떤 밤이었다.

거북이보다 느린 걸음으로 걸어가는 포토샵과 일러스트 사이를 오가며 끙끙거리고 있었고, 술자리 제의를 거절해야 했다. 술자리에는 못 가더라도 술은 마시고 싶었다. 사무실에 책상을 내어준 2인 중에 1인이 남은 맥주를 꺼내왔고, 사무실에 책상을 내어준 다른 1인이 동참하는 바람에 삼분의 일가량 남아있던 맥주는 금세 바닥을 보였다. 깊은 밤이었고 맥주를 사러가기는 무섭고 귀찮았고 사무실에 책상을 내어준 2인은 전혀 술을 사러 갈 의지가 없어 보였다(그만 마실 것도 아니면서!). 그러다 사무실에 책상을 내어준 다른 1인이 촬영 후 받아온 술이 4병 중에 소주의 알코올 도수와 가장 비슷한 이강주를 꺼내들게 되었고, 안주 없이 마실 수는 없어 중국집에 술국을 배달시켰고, 거의 처음으로 사무실에 책상을 내어준 2인과 나는 테이블에 둘러 앉아 이강주를 마시게 되었다. 향이 좋은 이강주를 칭찬하기도 하고, 촬영 스케쥴이 빡빡해 서로 만나지 못했던 동안 일어난 일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시시콜콜한 몇 가지 이야기를 하다 사무실에 책상을 내어준 2인은 게임에 빠져들었고, 나는 못다한 작업을 마무리지었다.

깊은 밤, 날짜는 무의미했어도 술자리는 의미있었다. 대화는 지속되어야 하지만 그것이 매일 지속될 필요는 없다. 서로가 서로를 염려하고 있다는 사실만 잘 전달되어도 -화려한 수식어로 치장하거나 가슴 아픈 반어법을 사용하지 않을 수록 사실은 더욱 잘 전달될 것이다- 대화로서의 기능은 충분하다. 그리고 그 기능을 유연하게 만들어주는 것으로 술이 사용될 수도 있다. 술은, 식객의 한 에피소드에 나오는 것처럼 영혼을 망가뜨리지 않는 선에서, 사용되어야 할 것이다. 다스릴 수 없다면 애초에 꺼내서는 안되는 것이다. 다스릴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꺼내드는 순간, 사람은 한없이 나약해진다. 그 모습은 전혀 가엽지 않다. 그러므로 나는 언젠가 다스릴 수 없는 순간이 오면 과감히 버릴 것이다. 술도, 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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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9. 19. 22:21

 

 

그 어느 해보다 더 깊이 가을 속으로 들어가게 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찾아왔다. 달리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 불길함이 찾아온 날, 참을 수 없어 삿포로 한 캔을 샀다. 눈에서는 아무것도 흐르지 않았는데 부족한 수분을 보충하기 위해 산 삿포로였다. 노랗고 커다란 별 하나 띄워놓고 그래 너 밖에 없구나, 주절거리는데 봄이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래, 너 밖에 없구나. 한 캔을 다 비우도록 갈증은 없어지기는커녕 더 깊어졌다. 가을처럼. 달리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삿포로 한 캔을 비우고 차가운 방바닥에 드러누워 흐릿한 전등을 멀거니 바라보는 일 밖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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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9. 19. 19:37

 

 

2주째 제대로 된 잠을 못 잤고, 산바 지나가던 날에는 아주 사소한 레이어들이 겹쳐 거대한 짜증을 만들어냈다. 감정의 파도는 당연 이리저리 휘둘렸지만 간신히 둑은 터지지 않아 차라리 우는게 낫겠다는 생각을 잠깐 했었다. 간신히 또 하루를 보내고, 또 하루를 보내려다 이건 아니다 싶어 술과 고기가 먹고 싶다던, 후배를 불러냈다.

그 아이와 나는 만성 우울을 안주 삼아 -실제로는 ‘가꾸니’라는 돼지고기 안주였지만- 각기 두 병의 소주를 비웠다. 비우는 동안, 재활용품을 이용한 가구 만들기에서 시작해 연애를 지나 고양이 기르기까지 꽤 폭 넓은 대화를 나누었다. 갓 비 그친 하늘처럼 어두컴컴한 두 사람이 술병을 만나며 개이기 시작했다. 가끔은 우울도 안주로 삼기에 나쁘지 않았다. 인테리어에 희망을 본 그 녀석에게나 오랜만에 꿈도 없는 잠을 잘 수 있었던 나에게나. 그러나 우울이란 안주는 늘 진한 숙취를 남긴다는 것이 오늘의 교훈.

 

* 끝이 꼬인 첫 번째 소주병의 뚜껑으로부터 시계 방향으로, 4병의 소주를 비웠다. 첫 번째 병을 채 비우기도 전에 우울이라는 안주가 다 떨어지는 바람에 그 다음번부터는 미처 별 모양을 만들거나 바구니 손잡이처럼 꼬아주질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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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7. 15. 17:56

 

 

큰 냉장고가 생겼다. 복잡한 과정은 생략하고, 냉장고가 생기면 가장 먼저하고 싶었던 것이 바로, 맥주를 종류별로 사다 넣어두고 야금야금 마시는 것이었다. 커다란 냉장고가 생기면서 이런저런 난리통을 겪는 바람에 -집안 구조상 어쩔 수 없이 고양이들에게 침실을 개방하게 되었고… 덕분에 파란만장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잠시 잊고 있었는데, 부슬부슬 비 오는 어느 오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기필코 오늘은 실행에 옮기리라며 편의점에서 -편의점이 아니면 일본 맥주를 종류 별로 구할 수 없어 아쉽다- 네 종류의 일본 맥주를 두 개씩 구입, 4열 종대로 세워 두었다. 세 칸 중에 윗 칸에는 김치가 조금, 가운데 칸에는 맥주들이, 아래 칸에는 물이 들어 있는 이 심플한 구조를 보면서 든 생각은 ‘아직 채워야 할 것이 많구나’였다. 며칠 지나는 동안 이가 빠지고, 다른 물건들이 조금씩 채워지는 바람에 사진에서처럼 예쁜 모습은 아니지만 그래도 냉장고가 생겨 가장 좋은 것은 이것이로구나 싶다.

그리고 큰 냉장고가 생기면서 냉동실도 생겼다. 얼음틀이 있고, 얼린 얼음 보관하는 상자도 있다. 얼음은 넉넉히 얼려두었으니 보드카 한 병 사다가 언더락이라든가, 칵테일 따위를 만들어 홀짝이면 그것으로 큰 냉장고에게 받을 수 있는 건 다 받는 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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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7. 3. 21:21

 

 

H는 맥주에 빨대 꽂아 마시는 걸 좋아한다. 생맥주든 병맥주든 캔맥주는 맥주를 마실 때면 대체로 빨대를 꽂아 마시곤 한다. 그래서 한 번 따라해 보았다. 음식을 먹을 때, 상대가 좋아하는 음식을 상대가 먹는 방식대로 먹다 보면 금세 친해진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고, 제법 설득력있는 이야기라 음식을 먹을 때면 주로 상대의 취향을 따르는 편인데 술이라고 오죽할까.

H는 배우이고, 오목교역 인근에 살고, 옥탑방에 살고, 자그마한 옥상에 평상을 놓고 지인들을 불러다 술도 먹고 밥도 먹고 한다. 아마도 그녀의 집에 두 번째인가 세 번째로 방문했을 때, 우리들은 낮부터 신나 있었고 내일이 없다는 듯 술을 마셨다. -왜 내 주위에는 내일이 없다는 듯 술마시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은 건지, 조금 궁금하다- H의 집에 도착하자마자 후식 삼아 마시기로 했던 캔맥주를 하나씩 들고 먹을 거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맥주는 조금 미지근했지만 그건 날씨 때문이 아니라 ‘함께’ 술 마시는 게 좋아서 달아오른 사람들의 열기 때문이었다. H가 맥주를 마시는 방법을 따라해보고 싶었던 게 기억이나 주방에서 빨대를 찾아 H의 캔에, 내 캔에 하나씩 꽂아서 쪽쪽 마시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빨대 끝에 맺히는 맥주 거품이 꽤 사랑스러웠다는 것이 시식평의 전부다. 빨대로 마시니 더 배부르다는 것도.

고기를 굽고 새송이버섯도 굽고 김치도 굽고 막걸리, 청주, 소주, 맥주 종류 가리지 않고 마셔댔다. 사람은 하나 둘, 늘어가고 빈 술병도 하나 둘, 늘어가고 취기도 하나 둘, 늘어갔다. 그러다 H를 붙들고 잠깐 훌쩍이기도 했고, H는 어서 집에 가라며 -고맙게도- 등을 떠밀어 주었고, 덕분에 더 큰 민폐 끼치지 않을 수 있었다. 아마도 일을 했고, 또 일을 해야 했고, 일이 끝나가기도 했고, 뭐 그렇고 그래서 잠시 훌쩍였던 모양이다. 술 마시고 훌쩍이는 버릇은 어떻게 고칠 수 있을지, 잠시 고민했는데 이내 그만 두기로 했다. 그렇게라도 훌쩍이지 않으면 견딜 수 없으니까.

 

옥상에서의 술자리 이후로 계속 맥주를 마시고 있다. 저녁에 밥 대신 한 캔, 우연히 들른 편의점에서 새로운 맥주를 발견하면 또 한 캔 -최근 편의점에는 일본 맥주가 강세인 듯 싶다. 심지어 ‘기린’도 있다!- 일이 조금 일찍 끝나면 기분 좋아서 한 캔, 일이 많으면 많으니까 또 한 캔, 집에서 사무실에서 홀짝 거리고 있다. 배가 부르지만, 다른 안주는 아예 입에 댈 수도 없게 배가 부르지만 서른 한 살의 여름, 맥주는 꽤나 큰 위로다.

 

세상의 계절과 다른 계절을 산다는 것, 어쩌면 맥주에 빨대를 꽂아 마시는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명확히 설명할 수 없어 아쉽기는 하지만 뭐 그런 느낌적인 느낌이 든다. 세상의 계절과 다른 계절을 살고 있고, 세상의 계절과는 상관 없이 하나의 계절을 끝냈고, 그래서 또 맥주는 필요하다. 필요할 때 필요한 것을 구할 수 있는 것만큼 다행인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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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3. 22. 18:12

K의 집들이였다. 그녀가 이사한 지 꽤 오래되었지만, 우리동네 사람들의 일정을 맞추다 보니 이제야 집들이를 열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일원 중 한 사람은 여전히 회사원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급성 배탈로 참석하지 못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나는 ‘막내’가 되었고, 소소한 놀림을 받았다.
K는 집들이가 아니라 그저 ‘놀러온 것’이라고 생각하라 했지만 그저 ‘놀러온 것’이라고 하기에는 상다리가 휠 정도로 많은 음식이 차려져 있었다. K는 마실 줄 아는 사람답게 만들 줄도 아는 사람이었다. 오후 1시 30분에 시작한 술자리는 저녁 9시 30분까지 이어졌는데, 쉬지 않고 먹고 마셨다. K의 시댁에서 가져온 동동주(라고 추정할 뿐)를 동동거리며 3리터 가량 마셨고(이렇게 맛있는 술이 또 있을까 싶다), 그러는 동안 K가 만든 음식마다 합격 통보를 해주었고, 오순도순 쉬지 않고 마셨다. 심지어 저녁 무렵엔 집 밖으로 자리를 옮겨 소주와 사케를 더 마셨다.
세 여자는 꽤나 광범위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무슨 이야기들을 나누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우리들은 이 기억상실이 취기 때문이 아니라 나이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리기도 했다- 매우 유익한 것들이었다. 먹고 마시는 데 필요한 양념이 아니라, 언젠가 팝업창처럼 튀어 나와 도움을 줄만한 그런 수다였다. 사실 수다는 여자에게 있어 그 주제를 불문하고 매우 건전하고 유익한 것이기는 하다.
 
그리고 그 다음날, 언제 그렇게 먹고 마셨냐는 듯 우리들은 안부 문자나 전화 한통 없이 다음 술자리를 기약하고 있다. 암묵적인, 우리동네만의 규칙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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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03.31 13:2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2012. 3. 20. 17:19


야심차게 시작하기는 했지만 머지않아 그저 내버려 두게 될 거라고 생각했었다. 오로지 술과 사람에 집중하는 탓에 사진 찍을 정신머리는 없었기도 하거니와, 그런 정신머리를 갖추게 것도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블로그를 잊어가는 사이 많은 일들이 있었다. 혹독한 가을을 보냈고, 쥐어짜야만 하는 겨울을 보냈다. 그리고 봄, 연극 한 편을 무대에 올렸다. 무모하게 연출도 두지 않고 객기 부리듯 밀어 부쳤던 공연이었다. 신경을 곤두세우고 툭하면 연습 핑계로 배우들과 술을 마시고, 4일 간의 공연을 마쳤다. 물론 스탭들과 뒷풀이를 했다.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배우들과 뒷풀이를 했다. 술, 술의 연속이었고 한 번 마셨다 하면 동 트는 건 예사였다. 그래도 뭔가 털어냈다는 기분은 들지 않았는데, 모처럼 혼자 맥주 한 캔을 마시면서 알았다. 혼자 정리할 시간이 없었다는 걸.
딱히 정리하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들을 만큼 들었고, 생각할 만큼 생각했으니까. 그래도 혼자만의 시간은 필요했다. 오랜만에 미뤄두었던 1984년 산 셜록홈즈를 보면서, 맥주 한 캔에 베이컨에삐를 턱이 뻐근하도록 씹어대면서, 호젓하다 느끼면서, 한편으로는 허전했다. 계속 이렇게 살 수 있을까 싶어서, 되도록이면 빨리 이 生이 끝났으면 해서. 쓸 수 있는 에너지가 한정되어 있다면 가능한 빨리 후닥닥 써버리고 끝났으면 싶어서. 성격만 급해서 될 일이 아닌데도….
최근의 화두는 <무한도전>이다. 시덥지 않든 대단하든 무모하든 당연한 것이든 계속 무언가를 한다. 빠듯한 스케쥴을 쪼개 스포츠댄스를, 에어로빅을, 조정을 연습하고 결승점에 도착해서는 펑펑 울어 제낀다. 그 기분을 조금은 알 것 같은 요즘이다. 그런 기분을 알아주었으면 싶은 사람이 알아주지 않아서 맥주 500ml가 터무니없이 부족하다 느꼈다. 그래도 알아주는 사람이 있어서 아사히가 유난히 달았다. 욕심 부리지 말자, 는 결론을 내리고 더 마시고 싶은 충동을 참았더랬다. 밖에 나가기 귀찮아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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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8. 13. 13:43

얼린 연어가 녹으니 먹을만하던 연어샐러드


아침부터 밤까지 꼬박, 일을 했다. 일이라기보다는 그저 노동이었다. 사수는 ‘현장에서는 다르다’며 겁을 잔뜩 주었는데 ‘뭐여, 시방’ 싶을 정도로 고요하게 일사불란하게 시간은 흘러갔다. 신데랄라라도 된 듯 자정이 되자마자 일이 끝났고 주차 때문에 잠시 소동을 겪기는 했지만 무사히 스튜디오로 돌아왔다. 조금 지쳐서 자동차 보조석에 늘어져서 야경을 바라보는데 운전이 하고 싶어졌고 뒤이어 술 생각이 간절해졌다. 스튜디오로 돌아가는 길에 우리 집 앞에서 내릴 기회가 있었는데 ‘시마이까지 같이 해야죠, 형님’이라는 말로 걷어찼다. 도시락 서른 여개를 촬영하는데 투입됐던 세 사람 중에 내가 제일 한 일이 없었으니 ‘시마이’까지 함께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이 ‘야생 체질’이라는 칭찬이 돌아왔다. 비에 젖은 야경은 여전히 아름다웠고 술은 더 간절해졌다. 스튜디오에 짐을 부려놓고 그를 불러냈다. 퇴근길에 ‘퇴근길’에서 한 잔 하기로 했다. 노동 후에는 노동酒를 마셔야지. 새참으로 마시는 막걸리처럼, 도시에서는 일이 끝나면 소주를 마셔야지. 오랜만에 사케를 마시고 싶었지만 어쩐지 사치 같았고, 채소 안주가 소주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탐구를 할 때라고 생각해 연어샐러드와 소주를 주문했다. 최근의 그는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준다. 두 병째 소주를 주문하면서 그가 내 이야기에 귀 기울인다는 사실이 생경했다. 그의 말처럼 서로 귀를 닫은 채 듣고 싶은 말만 들었기 때문이겠지. 그런데 첫 인상이 중요하다는 말, 자꾸 생각난다. 그래… 평행선을 걷는 거겠지. 어쨌든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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