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채울 수 없을 것 같다고 느꼈다. 몸 속에 수분이 차고 넘쳐, 조금이라도 비워내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느꼈다. 내 ‘상태’에 가장 많은 관심을 쏟고 있던 K를 만났다. 그녀가 먼저 나와 함께 만두가 먹고 싶다고 손을 내밀어 주었고, 우리는 ‘중간 지점’인 이태원에서 만나기로 했다. 벼르고 벼르던 만두 가게에서 맥주와 이과두주를 두고 고민하다, 메뉴를 정하며 -우리는 뜬금없는 우박을 함께 맞으며 약간 고무되기도 했었다- 순식간에 맥주에서 이과두주로 주종도 바꾸고 독주를 들이붓기 시작했다.
이과두주라기 보다는 고량주로 더 친숙한 중국산 독주는, 의외로 사과향이 났고 한 입에 털어넣기 좋았으며 두 병째를 비우는 와중에도 취하지 않았다. 결국 세 병을 비우고서야 카페로 자리를 옮겼고, 충동적으로 네일샵에 가 그녀도 나도 태어나 처음으로 네일케어를 받았다. 영업이 끝나갈 무렵 취기가 오른 채로 가게를 찾아간다는 게 조금 걸렸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뭐든, 해야만 했다. K는 기꺼이 나를 위해 자신의 시간을 내주었고 그런 K를 다시 카페로 데리고가 앉혀두고 조금 울었다. 여자들이 우는 이유란, 아무 것도 없다. 이유가 너무 많기 때문일 것이다. 너무 많아서 하나도 알 수 없는 이유로 나는 울었고, K는 붉어진 눈시울로 내 눈물을 닦아주었다. 편곡 작업을 해야 한다는 그녀를 카페에 남겨두고 지하철 막차를 타고 돌아와 잠에 드는 순간 내가 모르는 K의 시간들에 질투를 했던 것 같기도 하다. 자신의 핸드폰 주소록에 ‘우리시대작가’라는 수식어를 붙여 내 번호를 저장해 둔 K와, 매일 아침 성경 한 귀절을 전송하는 K와, 내 삼시 세끼를 염려하는 K와, 내 숙면을 걱정하는 K와, 내 어깨 위에 얹힌 일들을 미워해주는 K와, 아름다운 밤을 보내고 이과두주 뚜껑 세 개가 남았다. 손톱에는 검은 물이 들었고, 그득하던 수분이 조금 덜어졌다. 그 어느 해보다 가혹한 11월이 조금은 따뜻했던 그런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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