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12. 13. 13:07
이유없이 울적한 날이 있다. 하늘은 낮고, 낮부터 알코올 냄새를 맡기 위해 코를 킁킁거리게 되는 그런 날. 그런 날이면 메신저 친구 목록과 전화번호부와 각종 소셜 네트워크 사이트를 수시로 들락거리며, 최대한 고급스럽게 술자리를 만들기 위해 애쓴다. 시간 많은 티는 내지 않으면서 적당히 ‘센치한 척’ 하면서 수중에 지폐 몇 장 없는 빈곤을 수수한 모습으로 바꾸면서 술 마실 수 있는 기회를 만드는 것이다. 생각보다 꽤 공을 들여야 하고, 조금 짜증이 나기도 하고, 상대의 반응에 따라 감정 기복이 심해지고, 약간 피곤한 과정이다. 그러한 과정을 거쳐 M의 제안으로 홍대번개추진위가 꾸려지고, M과 나는 주변인들을 포섭하기 시작했다.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미끼를 덥석 물어준 A와 K를 홍대로 불러들이고 K와 먼저 접선하여, 떡볶이를 먹으러가다 말고 또다시 삼팔이네로 갔다(삼팔이네의 원래 이름은 삼삼이네, 1인분에 3300원하던 시절의 이름인데, 3800원으로 가격이 오르자 내 멋대로 삼팔이네로 바꿔 부르고 있다).

먹고 또 먹어도 좋은 안주. 내 고기 사랑의 깊이를 아는 K의 배려로 또 찾아갔다. 그러나 기분이 무거워져, 고기에게 미안한 마음 뿐이다.


시작은 좋았다. M과 A와 K와 나는 제법 화기애애하게 고기를 굽고 먹고 술을 마셨다. 고기와 함께 소주를 마실 때까지만 해도 별다른 이상 징후는 보이지 않았다. 늘 그래왔던 것처럼, 우리들이 한 두번 술을 마신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더더욱, 화기애매하지도 않게 즐거운 술자리를 만들어갔다. 얼큰하게 술이 들어가고, 배가 부르고, 자리를 옮겼다. 옮긴 자리에서는 오징어회와 오징어 튀김을 먹었는데 오징어가 별로 매력적이질 못했다. 아무리 회라지만, 채소를 채 썬 것보다 섬세하게 채썰린 오징어회와 과하게 기름진 오징어 튀김은 도통 소주와 어울리질 못했다. 하지만 모처럼 오랜만에 속엣말을 꺼낼 기회가 있었고, 새로운 인물 L이 합석했다. 어쩐지 여기서부터가 문제였지 싶다.
아는 사람 하나 없을 때는 극도로 낯을 가리고, 그래도 아는 사람이 한 둘쯤 있으면 조금 덜 낯을 가리는 나는, 새로운 인물이 제 아무리 술을 사랑하고 즐긴대도 그다지 달갑지 않은데, 그래서였나(여기서 ‘안다’의 기준은 1년 이상 거의 매일 얼굴을 보다시피하고, 그게 아니라면 적어도 10회 이상 술자리를 함께 한 경우를 이른다. 이 기준을 채우지 못하면 티가 안 난다고 믿고 싶기는 하지만 조금, 어색해하는 경향이 있다). 아니면 또 주변인을 도마 위에 올려 다지고 다지고 또 다져서인가. 그것도 아니면 이어진 3차에서 (어의 없게도) 처음 보는 보드카를 마셨기 때문일까. 늘 그렇듯 제법 멀쩡한 행색으로 집에 돌아왔고, 잠이 들었는데 다음날 눈을 떴을 때는 참을 수 없이 무거워진 기분 앞에서 당황하는 내 모습을 맞닥뜨려야 했다. 그리고 그 무거운 기분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 날 이후로 지금까지 지난 29년간 곱씹었던 단점을 모조리 꺼내 윤이 나게 쓸고 닦았는데도, 가벼워져야 할 기분은 여전히 무겁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폭주하는 손가락을 어디 묶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데, 일단 이 기록은 작성하기로 했다. 여기에 하나 더 보태 생각하지 않기로 한 것도 생각하지 않을 때까지 술을 잠시 쉬어야 하나 고민 중이다. 그럴리는 없겠지만. 여튼, 시작이 좋았어도 끝이 개운치 않은 술자리는 달갑지 않다. 전혀.
Posted by izayo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