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7. 26. 16:38


생일을 한 시간 앞둔 시각. 그와 함께 길 위에 있었다. 몇 시간 뒤부터 나는 지인들과 술을 마실 예정이었으므로, 알 만한 사람들끼리 그냥 같이 마시면 될 것을 내외하느라 굳이 참석하지 않겠다는 그를 위해 -나를 위한 것도 아니고!- 오붓한 술자리를 할 만한 장소를 찾고 있었다. 내가 급성위장염에서 벗어난 지 만 하루도 안 되었기 때문에 그가 계속 술을 마셔도 괜찮냐고 물어왔지만, 몇 시간 뒤의 술자리를 위해서라도 워밍업을 해야 한다는 내 주장대로 여차저차 술집을 찾아 들어갔다.

막상 마시려니 조금 겁이 나서 순해 보이는 -그래봐야 맥주와 도찐개찐, 그저 세트메뉴라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했기 때문이었다- 버니니와 모듬치즈를 주문했다. 그는 전작이 있었던 건 생각 않고 내가 버니니를 마셔본 적이 있다는 것에 살짝 질투를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자정. 드디어 생일, 이라기에는 뭔가 차분했다. 곳곳에서 축하메시지를 전해왔고 앞에는 버니니가 놓여 있었고 -행여나 그가 내 버니니를 빼앗아 마실까 전전긍긍하기는 했지만- 술집은 술집답지 않게 호젓했다. 그는 고양이 뒷모습이 멋스럽게 그려진 부채와 고양이 일러스트레이션이 들어간 카드지갑에 지폐 몇 장을 넣어 선물했는데, 가히 10년 만에 처음으로 비자금을 조성하여 마련한 것이라고 했다. 맙소사, 비자금이라니. 그걸 이제야 하다니. 그래도 10년을 공들인 보람이 있는 건가.

아무튼 매년 생일이 돌아올 때마다, 이건 뭔가 내 생일이 아닌 것 같고 나대신 어머니가 미역국을 드셔야 할 것 같고 개나소나 다 먹는 나이 나도 먹는 게 뭐 이상한가 싶고 생일 없는 사람 없는데 유난일 것 뭐 있나 싶다. 그래도 고맙다고 생각하게 되는 건, 매년 생일이 돌아올 때마다 사람을 선물 받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도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게 좋은 사람들이 말 한 마디 건네주고 술잔 기울여줘서 참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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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izayo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