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7. 28. 21:21

그가 오랜만에 일찍 퇴근했다(그래봐야 10시 30분 경). 케이블 방송에서 질리지도 않고 틀어주는 <시크릿 가든>에서 보았던 돼지껍데기의 잔상이 남아 있었고, 비가 왔고, “아침에 눈뜨자 마자 비가 내리는 것이 확인되는 오늘 같은 날에는 당장 창문을 활짝 열어 젖히고 삼겹살을 사다가 알뜰하게 구우면서 아침부터 취해 있어야지. 방바닥에는 버너와 부탄가스가 널부러져 있고 방바닥에는 기름이 튀어 있으며 커튼에 배인 고기냄새는 열흘은 족히 갈 테지. 그 상태로 종일 뽕 맞은 것처럼 헤롱거리면서 이리 뒹굴 저리 뒹굴 기타를 치다 처 울고 지독한 포르노를 감상해야지”라고 일갈한 학교 선배의 목소리가 계속 귓가를 맴돌았고, 돈이 없었지만 벌면 되겠지 싶어 돼지껍데기를 먹으러 갔다.
생각보다 한산한 ‘육값하네’에 앉아 돼지껍데기를 구워(저녁을 걸렀다는 그를 위해 주문한 오겹살 1인분도 함께) 소주 2병을 비웠다. 이례적인 일이다. 그와 함께 각자 1병씩의 소주를 비웠다는 건. 제법 심각한 주제로 제법 심각하게 논쟁을 벌였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최근에는 그와 술을 마시면 대체로 논쟁을 벌이게 되는 것 같다. 그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로서는, 그동안 쌓아 두었던 것들을 이제야(뜬금없다는 것은 나도 잘 안다) 털어놓기 때문인 것 같다. 같은 A형이라도 하고 싶은 말은 그때그때 해야 직성이 풀리는 그이지만, 나는 그렇지 않으므로 그가 꽤 당혹스러워하는 것 같다. 그렇지만 이제라도 조금씩 풀어내서 다행이라고, 이기적으로 생각해 본다. 그 어느 때보다 이기적이고 싶은 서른이다. 그 어느 때보다 이기적이어야 하는 서른이다. 서른의 사춘기는 제법, 소주 같다.


* 하도 오랜만에 구웠더니 돼지껍데기 굽는 법을 헷갈렸다. ‘말림’을 고려해 뒷면부터 구워야 하는데. 그래도 금세 잊어버린 방법을 되찾아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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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izayoi